치매관련사례
병 같지도 않은 병
관리자
2005-09-13 오후 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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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을 배달하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서자
“저 년이 저 혼자 배지가 터지게 쳐먹고 나는 온 죙일 쫄쫄 굶깄다 아이가? 아범 오마 저년 내쫓아뿌라칼끼다.”
할머니는 부뚜막에 올라앉아 입이 미어지게 찬밥을 떠 넣고는 먹다 남은 짠지를 손으로 집어 또 입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서 연신 건넌방을 향해 눈을 흘기시면서 욕을 해댄다.
“할머니, 엄마는 장사 나가고 집에 아무도 없는걸요?”
“이년이 머라 캐쌓노.. 애미가 저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걸 내가 보고 왔는데. 나는 굶어 죽으라꼬 밥도 안 주드라.  애비 오마 다 일러주고 말끼다.”

청춘에 혼자 되신 할머니는 아버지와 고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만큼 엄마를 보는 눈이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딸만 낳았다
“시집을 왔으마 대를 이어줘야 될낀데 너그 친정에서는 딸 낳는 연습만 시키가 보냈드나.”
엄마의 가슴을 후벼 파는 뼈아픈 소리를 많이도 하시더니 막내가 열 살 되던 해 산판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기를 삼년쯤이나 되었을까?
“어머님 저녁 드시이소”.
“아범도 안 왔는데 뭐 벌써 밥을 먹자카노. 기다맀다가 같이 먹게 상이나 봐 놓그라.”
그리고는 아끼던 모시한복을 꺼내 입고 삽짝에 나갔다 들어왔다가 하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모습에 놀란 엄마가
“어머님 누구를 기다리심니까?”
“누구는 누구라 아범이 오늘 오는 날 아이가? 니는 그런 것또 모르고 도대체가 머하는 사람이고? 으이? 뼈빠지게 벌어다 먹이 살려 봤자 저 모양이끼네, 뭔 낙으로 살 것노. 아이그 불쌍한 내 자식. 쯧쯧..”
“일부러 그러시제요? 아범이 세상 떠난 지 삼년이 지났는데 어쩨 온다 말입니까?”
그렇게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늦어져서야 제 정신이 돌아오신 할머니는 당신이 왜 모시옷을 차려입고 계셨는지 황당해 하셨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아버지는 힘든 일도 마다않고 늘 열심히 일을 하셨지만 모아 놓은 것 없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고 나자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인쟈 우째 살아야 되겠노.”하시던 엄마는 메밀을 사다가 묵을 쑤어서 장에 내다 팔아 봤다
그래봤자 다음 장날까지 먹을 보리쌀 살 돈도 부족한 형편이라 무싯날은 두부를 해서 이고 다니면서 팔아야 했는데 언니와 나는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많지 않은 단골집에 묵이나 두부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손끝 야문 엄마의 솜씨에 하나둘 단골집이 늘어나자 엄마는 시장통으로, 언니와 나는 배달지역을 하나씩 맡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고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동생들을 챙겨 돌보고 계셔야 할 할머니께서 또 집을 나가셨다
건넌 마을 고모네 식구들과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행방이 묘연했다.
경찰서에 신고도 하고 저수지 뚝방까지 다 찾아봤지만 본 사람이 없었으니.
“오빠가 없다꼬 엄마를 얼매나 괄시를 했으마 노인네가 집을 나가셨겠노. 이래 될 때까지 언니는 도대체 머했다 말잉교.”
할머니 상태를 잘 아는 고모지만 괜시리 엄마에게 화풀이를 해대고 그런 마음을 아는 엄마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나흘이 지나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고 고모와 함께 달려갔는데 초췌한 모습의 할머니는
“아이고 야야, 니 내가 미버가 내다 버린거 아이가? 딸만 낳는다꼬 구박해가 날 버린 거 맞제? 내 인쟈 안 그랄낀데 또 내다 버릴끼가? 에미야, 참말로 그랄끼가?
눈물을 펑펑 쏟으시면서 고모 옆을 지나 엄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머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말없이 나가셔가 고모네 식구들까지 나서가 얼매나 찾았는데요. 다시는 말없이 나가지 마이소 아셨지요?”
주름진 할머니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며 우는 엄마를 보며 과연 ‘저 모습이 진심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비수 같은 말을 많이 하셨던 할머니였기에 우리가 보기에도 심하다 싶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모셔오던 날 밤부터 엄마는 아예 할머니 방에서 기거를 했다
“너거 할매가 더는 나빠지지 말아야 될 낀데...아픈데 없이 계시마 얼마나 좋겠노.”
맷돌을 돌리느라 땀을 흘리면서 푸념처럼 한마디씩 하고는 한숨을 쉬신다.

그러나 엄마가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그해 가을 또 갑자기 집을 나가신 할머니가 윗마을 청년이 끄는 리어카에 실려 오셨는데 그때까지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머님, 제발 정신차리시이소. 이카다가 참말로 집을 못 찾아 오시마 우짤라꼬요.”
“오냐. 그래, 니 잘 만났따. 니가 내 금가락지 훔쳐갔제? 이년 오늘 내가 아주 직이뿔란다.”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흔들어 동네 사람 네 명이 달려들어 말렸지만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세던지 어느새 할머니 손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한 웅큼 들려있다.
“할매는 도대체 왜 엄마를 그래 미워한데요? 엄마가 뭔 죄가 있다꼬.”
헝클어진 모습으로 눈물 범벅이 된 엄마가 안 돼 보여서 한마디 하던 언니는 엄마한테 혼줄이 나고는 황당해 하고 있다.
그날 밤에도 밥 한양제기를 앞에 놓고 앉아 우리가 뺏어먹을까 봐 눈을 흘기시며 그 밥을 다 드시고 잠드시는걸 보고는 
“엄마 우리가 할매하고 잘게 엄마는 저 방에서 자라.”
“내 걱정은 말고 너거들이나 저 방에 가서 동생들 옆에서 자그라. 너거 할매가 저래 사나운 척해도 나는 밉지가 않다. 너무 일찍이 혼자되셔가 자식들 남매 안 굶기고 키우니라꼬 안 해 본 일이 없었단다. 내사 너그들이 도와줘가 힘이 되지마는 너거 고모 다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카드라. 얼마나 힘이 드셨겠노.”
“그래도 그렇제 아버지도 안 계신데 우짤라꼬 엄마를 때리고 그카노 말이다. 내사 할매가 미버 죽겠다.”
“그런 생각 하지 말그라. 정신이 온전치는 않지마는 그래도 집안에 어른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할매가 엄마를 그래 구박했는데 참말로 안 밉다 말이가?”
“더러 미운 적이 없었다카마 거짓말일테고. 그런데 막상 저래 되고 보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도 저런 날이 오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들고...”
언니와 엄마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아득했다.

가끔은 본정신이 돌아오던 할머니의 증상이 나날이 나빠져서 이제는 우리들마저도 알아보지 못 하신 채 그저 원하는 게 밥이었다.
금방 한 사발 드시고도 배곯아 죽겠다며 
“이보소 동네사람들요, 저년이 나를 굶겨 쥑일라 카네요. 날 쫌 살리주이소~~~~엉엉.”

그런 상태로 6년을 더 사셨는데 어느 날은 머리를 감아 빗고 겨울이었는데도 아끼던 모시한복을 곱게 있으시고는 닳는다며 꼭꼭 싸서 숨겨뒀던 금가락지까지 꺼내 끼고 앉아 뭣이 그리 좋으시던지 색시처럼 고운 웃음을 웃으셨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와 언니에게도 바깥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시며 자꾸만 웃으시자,
“어머님 추운데 왜 여름옷을 입으셨어요? 그 옷은 날이 풀리고 나서 입어야 되는걸요.”
엄마가 한마디 해도 그저 웃고만 계셨다.
늦은 저녁상 앞에서 수북하게 퍼온 밥그릇을 내려다 보시고는 숟가락을 들어 크게 한 술 떠서는 엄마 밥그릇에 덜어주고 또 웃으셨다.
“어머님 지는 괜찮아요. 늘 시장하신데 마이 드셔야지요.”
할머니는 그 말도 못 들은 척 하셨다.
다음날 새벽 엄마의 외마디소리에 일어났는데 할머니는 자는 듯이 누워 계셨다.
치매라는 무서운 병을 앓았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보였고,
한이 많은 세월을 사셨던 분이지만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금새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십여 년 동안 마음고생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을 엄마의 울음소리가 낮은 담장을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