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관련사례
어머니, 감사합니다
관리자
2005-09-13 오후 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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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풀리는 듯싶더니 오늘은 또 매섭게 춥습니다.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일상의 모든 변화들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벚꽃 만발한 봄날, 치매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눈물 뚝뚝 떨구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울면서 집으로 왔던 게 벌써 2년 전 일입니다. 엄마는 21살에 혼자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책임감 없이 2살 된 언니와 다음 달이면 태어날 저와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엄마를 이 세상에 버려두고 혼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을 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유복녀인 저를 3일 동안의 진통 끝에 혼자 낳아 당신의 속치마 찢어서 기저귀 만들어 저를 키웠다고 했습니다. 아무 능력 없는 어린 여자가 두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별별 일 다 하면서 제가 6살 되기까지 세 식구가 같이 살았습니다.
제게는 큰 고모님이 계셨는데 엄마의 처지가 딱하니까 아이들은 당신이 맡을 테니까 새로운 인생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팔자 고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고모 댁에 맡기면 먹는 거 입는 거 걱정 안 할 것 같아서 어린 저를 고모 댁에 맡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언니를 데리고 있고 저를 맡기기로 결정한 것은 언니는 여자아이 같지 않게 개구쟁이 짓을 많이 하고 저는 얌전해서 고모 댁에 가서도 미움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저는 신기하게도 그 모든 일들이 마음속에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엄마도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고 저도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존재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던 나이에 엄마랑 헤어지던 날,  그런 운명을 타고나서 그랬던지 나는 엄마 마음이 아플까봐 울음을 참았습니다. 그날 밤,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별이 왜 그렇게  슬퍼보였는지. . .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끝없이 엄마, 엄마를 부르면서. . . . . .

가끔씩 엄마는 저를 보러 오셨고  그런 날이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곤 했었습니다. 당신 자식이 없으셨던 고모부, 고모는 제게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처지가 그러니 만큼 저도 또한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시장에서 가게를 하셨던 고모를 대신하여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일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그런 저를 보고 애어른이라 말씀하셨지요. 어린 시절 나의 꿈은 선생님도 아니요 간호사도 아닌 빨리빨리 커서 돈 벌어서 엄마랑 한번 살아보는 거였습니다. 정말 너무나 간절하게... . . 

제가 그렇게 사는 동안 엄마는 노점상을 하시면서 언니와 같이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언니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시고 어린 저를 떼어 놓고 마음고생이 너무 심하셔서 엄마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해하시고 급기야 마음의 병을 얻으셨습니다. 상태가 안 좋으셔서 저랑 같이 모여 살면 좀 나아지실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많이 한 끝에 제가 21살 때 엄마랑 같이 합쳐서 살기로 했습니다. 여태껏 키워주신 고모부, 고모와 이별하는 그 아픔은 어렸을 때 엄마랑 헤어지던 그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낳은 정 못지않은 기른 정 때문이었겠지요. 그리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간다는 죄스러움에 정말 몸이 야윌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동안에 조카를 양자로 들이신 고모부, 고모 곁에는 손자, 손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엄마, 언니, 저 이렇게 셋이서 정말 꿈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언니와 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언니와 같이 사시구요.  외손녀 사랑에 듬뿍 빠져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지병인 신경성으로 인하여 정신과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연세 64세 되시던 어느 가을날 갑자기 저의 집에 오셨는데 전화번호를 몰라서 직접 오셨다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어머니의 치매증상은 정말 빠른 속도로 나빠지셨습니다.
당신이 사시는 아파트를 잊어버려 집을 못 찾아오시고, 자신도 모르게 옷에다 소변을 보시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병원 원장님의 말씀이 이제는 ‘돈’과의 전쟁이다. 그동안 엄마의 병력으로 보아 정신질환과 치매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니 보통 치매 환자하고 또 달리 집에서 모시기가 무척 힘들 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정말 언니와 저는 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엄마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 있을 수가 없을뿐더러 자꾸만 밖으로 나가 버리시고 어쩌다 들어와 보면 식용유를 온방에 뿌려놓고 문지르고 계시고, 자신의 이빨을 끊임없이 계속 흔들어 대시며 피가 나는데도 그게 제어가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나가셔서 밤 12가 넘도록 엄마를 찾지 못하며 온 식구가 경찰서마다 다니며 엄마를 찾아 헤맨 일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우선 엄마의 신변이 걱정스러워 저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으로서 정말 힘든 결정을 하고  병원에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부터 제게 있어 행복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우리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고 병원에 계신데 어떻게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좋은걸 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쩌다 누워서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마치 죄인 같아 등을 바닥에 대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기막힌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언니와 저는 많이 마음을 다잡게 되었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워 더  많은 일을 해서 엄마 병원비를 대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한 끼라도 집 밥 드시게 한다고 꼭 챙겨서 병원에 다녀옵니다. 그 병원 원장님이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보호자는 처음 본다고,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할머니 돌아가셨을 거라고. . . . 말씀 하십니다. 언니 같은 자식을 둔 엄마는 행복한 분이겠죠? 죽어야만 끝이 날 것 같았던 고통이었는데 살다보니 나름대로 살아지게 된 겁니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걸 드려도 그걸 알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 어머니, 그래도 하늘보다는 자식 곁이 낫겠지요. 요즈음 경제적으로 힘들어 생명 같은 자식을 기관에다 맡기고 찾아오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는 사실을 방송을 통해 보게 되면 어릴 적 저의 상황이 생각나 그 슬픔은 다른 사람들의 몇 배로 다가오게 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이 가족 간에 일어나는 일들일 겁니다. 헤어짐, 병듦, 돈이 없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실들. . . . 하지만 참아내고 이겨내야 합니다. 쓰러지게 만드는 운명에 부딪혀 지혜롭게 겸허하고 감사하게  내게 남은 인생을 살아낼 겁니다. 그것은 가엾은 내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내 딸, 그리고 언제나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늘 제 곁에 있어주세요...사랑합니다...